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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신앙

타락한 교회와 독재자를 비판했던 본회퍼

by 날기새 2022.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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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주안장로교회(주승중 위임목사)는 2022년 1월 6일 예배부터 축도 전, 회중이 함께 부르는 찬양시간에 '선한 능력으로'를 부르고 있는데요. 찬양 '선한 능력으로'를 아는 분은 많지만, 이 찬양 가사를 디트리히 본회퍼가 지었다는 사실을 아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본회퍼의 생애


1906년생인 본회퍼는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입니다. 그가 27세이던 1933년 독일은 나치가 집권하기 시작했던 때였는데, 당시 독일교회 주류는 나치즘을 규탄하기는 커녕, "하나님이 영혼구원을 위해 예수를 보내 주셨듯이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경제적, 사회적으로 극도로 피폐해져 있던 독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히틀러를 보내주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일부 목사들이 권력에 아부하는 모습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신학자로서의 재능을 높이 산 미국 유니온 신학교는 영국에 체류 중이었던 본회퍼에게 연구교수직을 제안하며 나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려 했지만, 본회퍼는 누군가는 어둠 속에 있는 동포들을 섬겨야 한다며 나치 치하의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라디오 방송과 신문을 통해 "교회가 히틀러라는 우상을 숭배하게 하고 있다"며 우경화된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나치에게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나치는 "국론을 분열시킨다"는 이유로 본회퍼의 사회적 활동을 제한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앙적 양심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 뛰어드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나치가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본격화하자, 은밀하게 유대인들을 구출하는 활동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1943년 4월, 결국 나치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종전을 불과 한 달 남겨둔 1945년 4월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을 당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9세였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본회퍼의 마지막 편지


본회퍼는 교수형 당하기 얼마 전, 가족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에는 거의 삶과 신앙을 담은 자작시가 적혀 있었습니다. 바로 이 시를 가사로 하여 곡이 붙여진 찬양이 '선한 능력으로(Von guten Mächten)' 입니다.

본회퍼가 감옥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


이 찬양의 가사는 여러 버전으로 번역이 되어 있고, 의역 때문에 문장이 그대로 매칭되지는 않습니다만, 독일어 가사를 원문 그대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Von guten Mächten (선한 능력으로)

Von guten Mächten treu und still umgeben
(선한 능력으로 조용히 둘러싸여)
Behütet und getröstet wunderbar
(놀랍게 보호받고 위로가 되네.)
So will ich diese Tage mit euch leben
(그렇게 당신과 함께 이 날을 살고)
Und mit euch gehen in ein neues Jahr.
(당신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리.)

Von guten Mächten wunderbar geborgen,
(선한 능력으로 놀랍도록 보호받고)
Erwarten wir getrost, was kommen mag.
(일어날 일들을 믿음으로 기다려.)
Gott ist mit uns am Abend und am Morgen
(하나님이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니)
Und ganz gewiss an jedem neuen Tag.
(하루 하루 확신하며 사네.)


맨 위에 링크한 유튜브의 찬양과 다른 버전의 가사로 번역된 영상을 하나 더 소개합니다. 원문에 좀 더 가깝게 번역된 버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Q19OKaMNBo&t=33s



본회퍼의 신앙적 양심


본회퍼는 신앙적 양심을 기반으로 히틀러를 우상화하는 독일 교회를 비판하고 반나치 운동을 펼치며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는 사상자의 장례를 돌보는 것보다는 핸들을 뺏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필요하다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 고난을 감내하는 것이 신앙인의 의무라고 여겼던 본회퍼...... 그는 "죄에 대한 고백이 없는 성만찬", "죄에 대한 회개 없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독일교회의 설교"가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켰다며 탄식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따름이 없는 은혜, 그리스도를 따름에 따른 고난이 없는 은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 없는 신앙은 싸구려 신앙에 불과하다"고 부르짖었습니다.

사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본회퍼의 아버지는 아들이 목사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아니라 물신과 우상을 섬기고 있는 교회의 현실을 간파하고 있었던 아버지는 "종교는 부르주아에게나 어울린다" 며 본회퍼를 설득하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본회퍼는 "그렇다면 제가 바꾸겠습니다" 라면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기독교 신앙을 따라 고난의 길을 자처했던 본회퍼. 비록 본회퍼는 나치의 폭압과 거짓된 독일교회의 방조 속에 목숨을 잃었지만, 이 땅 이후의 천국 소망이 있었기에 그는 교수형을 앞두고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이로써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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