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만수(늦은 이삭)'.
김정준 목사는 1914년 경남 동래(지금의 부산)의 조그만 산골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산골이었기 때문에 매일 50리 길을 걸어서 보통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평양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산정현 교회에 출석했는데 당시 산정현 교회에 시무하셨던 송창근 목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후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하고 1943년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 본과를 졸업한 후 같은 일본 기독교단 교사보 시험(목사 자격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경주와 대구에서 목회 생활을 시작했고, 1945년에는 송창근 목사가 시무하던 김천 황금동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했습니다. 하지만 1946년 부활절 설교를 준비하다 각혈하며 쓰러졌는데, 당시로서는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던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교회를 사임하고 1946년 6월 18일 마산 요양소에 격리됩니다.
그는 요양소에 들어가서 자기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간호원들이 자기를 다른 환자들과 구분해서 6급 환자 병동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 병동은 '공동묘지 병실', '죽음의 방'이라고 불리던 병동이었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환자들만 수용하는 병실이었습니다. 의사들은 김정준 목사에게 3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수근댔습니다.
더구나 그는 장결핵까지 앓았기 때문에 먹는 것은 다 아래로 쏟아 버렸습니다. 결핵환자는 무엇보다 영양을 잘 섭취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이 꼴이 하도 딱해서 종군목사 한 사람이 영양 보충하라고 햄 쏘시지를 갖다 준 것을 먹고 오히려 위경련이 나서 아사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서를 써 놓고 죽을 날을 기다렸습니다.
더구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은 6급 공동묘지 병동에 있는 자신에 대한 의사, 간호원의 차가운 시선과 대우였습니다. 김정준 목사에게는 생명이 3개월 밖에 안 남았다는 것보다 이것이 더 괴로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소명을 갖게 됩니다.
"나의 생명을 주심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심도 하나님이니,
의사가 내린 시한인 3개월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한으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그 때부터 죽기 전까지 남을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해서 변기 통을 집어 준다거나 음식을 먹여 준다거나, 물수건을 건네 주는 등의 일이었습니다. 죽어 가는 17세 소녀의 변기를 갖다주고 뒤 본 것도 치워주는 일도 했습니다. 일어나지도 못하는 소녀가 악을 쓰며 간호원을 불러도 간호원이 오지 않으니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런 일들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자기 몸도 움직일 힘이 없는데, 죽을 사람이 그런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김정준 목사는 이런 봉사 외에 하루에 세 번씩 같은 환자들에게 성경을 읽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의사들은 하루라도 더 살려면 힘을 아끼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김 목사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니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장 중태였을 때 삶과 죽음의 의미를 더 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3개월 동안 20명의 장례식을 집례했습니다. 운명한 병자의 시신을 치우고 거들기를 수십 차례, 그 일을 하면서 이미 시한부 선고를 받은 3개월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병으로 인해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병을 얻으면 반드시 죽는 것만은 아닙니다.
나는 병을 얻어서 오히려 절망에서 새로운 힘과 삶을 얻었기 때문에
삶에 이르는 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는 1948년 11월 30일 퇴원하였고, 이날을 그의 제2의 생일로 삼으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6급 환자인 그가 퇴원하여 정상적으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실로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관에서 나온 사나이"라고 불렀습니다.
제2의 삶을 살게 된 김정준 목사의 여생 33년은 사실상 신학, 목회, 선교,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가득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는 한신대에서 교수와 초대 학장(1961.09~1962.05)으로, 그리고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의 교수와 교목실장(1963.04~1969.02)으로, 연합신학대학원 초대 원장(1964.01~1970.04)으로 봉직했습니다.
1965년에는 전국신학대학협의회를 창설, 초대회장을 지냈습니다. 1963년에는 한국 구약성서 번역위원으로, 1967년부터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신학교육기금(TEF) 연구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서울성남교회에서도 목회하면서도 꾸준한 연구로 구약과 신약의 이질감을 줄이고 동질성을 회복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한신대 김이곤 명예교수의 말입니다.
"김정준 목사님은 고난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기고 이를 신학적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 분은 캐나다와 독일, 스코틀랜드에서 유학하며 서구신학을 두루 섭렵한 후 신학이 성숙기에 이르렀을 즈음, 해방신학과 빈자신학, 수난자의 신학, 민중신학 등의 모습으로 신학적 사대주의를 극복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류 구원 역사만을 추구했던 그의 신학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감신대 방석종 교수의 말입니다.
"김정준 목사님은 서구 독일신학과 신학자들의 학문을 폭넓게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역사비평 방법을 활용해 구약을 학문적으로 연구했으며 특히 경건신학과 시편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김 목사님이 늘 학생처럼 성경을 연구하며 설교를 준비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1960년대 혼탁한 사회에 아모스처럼 따끔한 질책을 서슴없이 하셨던 것도 잊을 수 없습니다. 교파와 학파를 넘어 김 목사님의 삶과 신학을 연구하는 학구적인 모임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백석대 민경배 석좌교수의 말입니다.
"김정준 박사는 어린애처럼 순수한 영혼을 가졌던 분입니다. 경건주의적 신앙으로 한국의 여러 신학대 교수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그래서 다들 한국 신학의 주축 지도자로 추앙했던 분입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황용대 증경회장의 말입니다.
"한신대 학생 시절 만났던 김정준 목사님의 경건에 관한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가장 회복해야 할 것이 경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정준 목사의 대표적인 역서로는 '어거스틴 참회록', 토머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로데스의 '시편' 등이 있고, 저서로는 '나의 투병기', '에큐메니컬운동해설',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연구', '이스라엘의 신앙과 신학', '구약신학의 이해', '구약성서의 인간관' 등이 있습니다. 1960년 ‘구약성서개론’, 1970년 ‘폰 라트의 구약신학’, 1978~1980년 ‘시편 명상’Ⅰ-Ⅳ, 1987~1991년 ‘구약의 역사와 신앙 연구서’ 등이 수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김정준 목사는 찬송가 9장 <하늘의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의 작사자이기도 합니다.
김정준 목사가 지은 시 한 편을 옮기며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내가 죽는 날
김정준 목사 지음
내가 죽는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에 이르리니” 찬송을 불러주오.
또 요한계시록 20장을 끝까지 읽어주오.
그리고 나의 묘비에는 이것을 새겨주오.
“임마누엘” 단 한마디만을!
내가 죽는 날은
비가와도 좋다.
그것은
내 죽음을 상징하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를 씻음 받은 감격의 눈물!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세상의 시름을 없이하고
하늘나라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라.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추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에 안긴
내 얼굴의 광채를 보여 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저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니라.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의 뜻이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을 알 수 있을 터이니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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